증말 재미난 요나 이야기 (3)
- 뻔! 뻔한 스토리?
(요나서 1장3절)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1.
많은 현대인들은 종교에서는 늘 뻔한 말만 한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흥미도 못느끼는 것 같다. '착하게 살아라!’, '다 버리고 살아라!' '신에게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지옥간다.' 보통 이 정도로 단순화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조금 엿보자! ‘심청전’은 어떤가? 착하게 살아서 나중에 왕비가 되고 아버지 심학도에 눈도 뜨게 되는 내용이다. '금도끼 은도끼’ 를 보자! 정직한 이에게 금도끼와 은도끼와 잃어 버렸던 쇠 도끼까지 주는 산신령님이 등장한다. 뭐 이 정도면 그 주제면에서 뻔한게 맞는 듯하다. 권선징악, 지성이면 감천이다로 딱 정리된다.
요나서도 처음 대할 때 그런 뻔한 이야기 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읽다 보면 뭔가? 일반적인 종교 공식과 다른 냄새가 난다.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것 처럼 껄쩍찌근헌 느낌이랄까? 허 참!
2.
본문을 읽어 보면 하나님은 요나에게 악독이 가득한 땅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명령한다. 그러면 당연히 명령대로 순종하고, 그래서 복을 받고, 자자손손 잘 되었다고 마무리되는 스토리가 편했을 텐데. 처음부터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튄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욘 1:3)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했는데 요나는 다시스로 내려 가는 배를 탔다. 더욱이 하나님을 피해 도망 가려고 ‘배삯’까지 치르고 말이다.
구글 위성 지도를 찾아 30cm 자로 거리를 재보았다(그래서 정확도가 좀 떨어질 수 있음). 니느웨가 예루살렘에서 얼마 정도 거리일까 궁금하기도해서. 약 800km 정도된다. 눈대중으로도, 다시스는 니느웨보다 4배는 더 멀어 보인다. 약 4000km. (사진에 지도를 참고하시라!) 가성비로 따졌을 때, 다시스로 도망가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는 것이 4배는 더 이익이다. 비싼 뱃삯을 지불하고 약 4000km 거리의 다시스로 가는 것 보다는, 800km 거리에 니느웨를 향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을텐데. 요나는 가성비가 높은 순종의 길을 놔두고 왜? 가성비도 낮은 불순종의 길로 내려갔을까? 만나서 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3.
요나가 부패한 가짜 종교인이라서 그랬을까? 사극 같은데 보면 기방에서 술먹고 행패부리는 땡초들이 가끔 나오지 않나? 그런거 처럼 말이다. 그런데 열왕기에 기록에 보면 요나는 자신이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영험한 선지자였다. 열왕기하 14장에는 요나라는 선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왕하14:25) 아무래도 불량한 가짜 선지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면, 하나님이 명령한 일이 힘든 것이어서 그랬을까? 하나님은 그냥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하셨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해 외치라!” 그야말로 그냥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외치면 되는 거였다. 무슨 ‘개고생'을 명령하신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도망갔을까? 아 답답하다! 답이 없어서 답! 답! 하다.
4.
요나의 행동은 성경과 요나서를 단지 종교적 문서라는 이유 때문에 '뻔한 이야기 일거라' 단정해 버리는 우리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갖게 한다.
아무튼,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것 처럼 껄쩍찌근허다.
증말 재미난 요나 이야기 (3)
- 뻔! 뻔한 스토리?
(요나서 1장3절)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1.
많은 현대인들은 종교에서는 늘 뻔한 말만 한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흥미도 못느끼는 것 같다. '착하게 살아라!’, '다 버리고 살아라!' '신에게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지옥간다.' 보통 이 정도로 단순화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조금 엿보자! ‘심청전’은 어떤가? 착하게 살아서 나중에 왕비가 되고 아버지 심학도에 눈도 뜨게 되는 내용이다. '금도끼 은도끼’ 를 보자! 정직한 이에게 금도끼와 은도끼와 잃어 버렸던 쇠 도끼까지 주는 산신령님이 등장한다. 뭐 이 정도면 그 주제면에서 뻔한게 맞는 듯하다. 권선징악, 지성이면 감천이다로 딱 정리된다.
요나서도 처음 대할 때 그런 뻔한 이야기 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읽다 보면 뭔가? 일반적인 종교 공식과 다른 냄새가 난다.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것 처럼 껄쩍찌근헌 느낌이랄까? 허 참!
2.
본문을 읽어 보면 하나님은 요나에게 악독이 가득한 땅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명령한다. 그러면 당연히 명령대로 순종하고, 그래서 복을 받고, 자자손손 잘 되었다고 마무리되는 스토리가 편했을 텐데. 처음부터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튄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욘 1:3)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했는데 요나는 다시스로 내려 가는 배를 탔다. 더욱이 하나님을 피해 도망 가려고 ‘배삯’까지 치르고 말이다.
구글 위성 지도를 찾아 30cm 자로 거리를 재보았다(그래서 정확도가 좀 떨어질 수 있음). 니느웨가 예루살렘에서 얼마 정도 거리일까 궁금하기도해서. 약 800km 정도된다. 눈대중으로도, 다시스는 니느웨보다 4배는 더 멀어 보인다. 약 4000km. (사진에 지도를 참고하시라!) 가성비로 따졌을 때, 다시스로 도망가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는 것이 4배는 더 이익이다. 비싼 뱃삯을 지불하고 약 4000km 거리의 다시스로 가는 것 보다는, 800km 거리에 니느웨를 향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을텐데. 요나는 가성비가 높은 순종의 길을 놔두고 왜? 가성비도 낮은 불순종의 길로 내려갔을까? 만나서 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3.
요나가 부패한 가짜 종교인이라서 그랬을까? 사극 같은데 보면 기방에서 술먹고 행패부리는 땡초들이 가끔 나오지 않나? 그런거 처럼 말이다. 그런데 열왕기에 기록에 보면 요나는 자신이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영험한 선지자였다. 열왕기하 14장에는 요나라는 선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왕하14:25) 아무래도 불량한 가짜 선지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면, 하나님이 명령한 일이 힘든 것이어서 그랬을까? 하나님은 그냥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하셨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해 외치라!” 그야말로 그냥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외치면 되는 거였다. 무슨 ‘개고생'을 명령하신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도망갔을까? 아 답답하다! 답이 없어서 답! 답! 하다.
4.
요나의 행동은 성경과 요나서를 단지 종교적 문서라는 이유 때문에 '뻔한 이야기 일거라' 단정해 버리는 우리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갖게 한다.
아무튼,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것 처럼 껄쩍찌근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