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말 재미난 요나 이야기 (6)
- "큰 물고기"
(요나서 1장 17절)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1.
‘신비'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mystery(미스터리)라고 한다. 신비의 영역에는 ‘귀신’, ‘영혼’, ‘신’ 이런 단어들이 포함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언하는 책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을 ‘신비’가 담긴 책으로 읽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과학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신비’의 세계까지 과학으로 파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어떤 무언가가 과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신비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과학은 엄연한 한계가 있다. ‘신비’의 영역을 탐구할 수는 없다.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기적을 실험을 통해, 관찰을 통해 객관화할 수는 없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욘 1:17)
하나님은 바다에 빠진 요나를 위하여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 그리고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그리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있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현대인들은 '어떻게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살 수 있겠나?’ 묻는데만 몰두한다. 그리고는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해’라고 결론 내린다. 결국, 요나서를 덮어 버린다. 그러나 요나서는 신비의 영역에 속해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바다에 폭풍을 제어하고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는 권력를 소유한 하나님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일들은 신비 그 자체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잃어 버리고 말 것이다.
2.
요나서가 증언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크신 분이다. 땅과 바다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다. 바람과 파도를 마음대로 조종하시고 물고기도 다스린다. 그런데 이 크신 하나님이 요나에게 자꾸 간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스스로 죽겠다고 각오하고 폭풍속 바다로 뛰어든 선지자를 특별한 기적으로 보존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아무튼, 하나님은 요나와 씨름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의 생명을 보존해야할 만큼 그와 '어떤 논쟁'을 하고 있는 것만은 명확하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니느웨 성을 위해 어떤 특별한 일을 이루기 원한면 여러 다른 사람을 통하여서도 충분히 할 수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한 신이 아닌가? 사람이 없어도 기적으로 하고픈 일을 마음껏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요나 선지자말고도 일군은 많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미리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살려둔 이유가 니느웨에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요나 안에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함 임을 알 수 있다. 요나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요나의 뜻을 바꾸기 위해 하늘의 하나님이 작은 한 사람 요나를 붙들고 있는 중인 것이다. 다시스로 도망가는 예언자를 폭풍으로 추격하는 열심으로, 또 큰 물고기를 동원하는 열심으로 하나님은 요나에게 무언가를 말씀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이 무엇인지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3.
한국 교회는 스스로를 '어떤 일을 하는 종교 단체'로 인식해 온 것 같다. 그래서 교회마다 어떤 목적을 세우고 달음박질해 왔다. 큰 예배당을 짓는다든지, 교인 수를 몇 명으로 늘린다든지, 아니면 선교사 몇 명을 파송한다든지. 그러면서도 '어떤 일을 성취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묻지 못했었다.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남겨 두고, 보존하는 이유가 그분의 백성들 안에, 그들의 인생과 생각과 마음 안에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함일거란 생각은 별로 해보지 못한 것 같다. 큰 물고기를 통해 요나의 생명을 유지시키면서까지도 그와의 논쟁의 끈을 놓지 않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보존하고 있다면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부디 요나서를 읽어 나가는 동안에 우리 인생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행복이 찾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증말 재미난 요나 이야기 (6)
- "큰 물고기"
(요나서 1장 17절)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1.
‘신비'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mystery(미스터리)라고 한다. 신비의 영역에는 ‘귀신’, ‘영혼’, ‘신’ 이런 단어들이 포함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언하는 책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을 ‘신비’가 담긴 책으로 읽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과학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신비’의 세계까지 과학으로 파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어떤 무언가가 과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신비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과학은 엄연한 한계가 있다. ‘신비’의 영역을 탐구할 수는 없다.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기적을 실험을 통해, 관찰을 통해 객관화할 수는 없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욘 1:17)
하나님은 바다에 빠진 요나를 위하여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 그리고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그리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있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현대인들은 '어떻게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살 수 있겠나?’ 묻는데만 몰두한다. 그리고는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해’라고 결론 내린다. 결국, 요나서를 덮어 버린다. 그러나 요나서는 신비의 영역에 속해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바다에 폭풍을 제어하고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는 권력를 소유한 하나님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일들은 신비 그 자체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잃어 버리고 말 것이다.
2.
요나서가 증언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크신 분이다. 땅과 바다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다. 바람과 파도를 마음대로 조종하시고 물고기도 다스린다. 그런데 이 크신 하나님이 요나에게 자꾸 간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스스로 죽겠다고 각오하고 폭풍속 바다로 뛰어든 선지자를 특별한 기적으로 보존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아무튼, 하나님은 요나와 씨름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의 생명을 보존해야할 만큼 그와 '어떤 논쟁'을 하고 있는 것만은 명확하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니느웨 성을 위해 어떤 특별한 일을 이루기 원한면 여러 다른 사람을 통하여서도 충분히 할 수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한 신이 아닌가? 사람이 없어도 기적으로 하고픈 일을 마음껏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요나 선지자말고도 일군은 많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미리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살려둔 이유가 니느웨에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요나 안에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함 임을 알 수 있다. 요나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요나의 뜻을 바꾸기 위해 하늘의 하나님이 작은 한 사람 요나를 붙들고 있는 중인 것이다. 다시스로 도망가는 예언자를 폭풍으로 추격하는 열심으로, 또 큰 물고기를 동원하는 열심으로 하나님은 요나에게 무언가를 말씀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이 무엇인지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3.
한국 교회는 스스로를 '어떤 일을 하는 종교 단체'로 인식해 온 것 같다. 그래서 교회마다 어떤 목적을 세우고 달음박질해 왔다. 큰 예배당을 짓는다든지, 교인 수를 몇 명으로 늘린다든지, 아니면 선교사 몇 명을 파송한다든지. 그러면서도 '어떤 일을 성취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묻지 못했었다.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남겨 두고, 보존하는 이유가 그분의 백성들 안에, 그들의 인생과 생각과 마음 안에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함일거란 생각은 별로 해보지 못한 것 같다. 큰 물고기를 통해 요나의 생명을 유지시키면서까지도 그와의 논쟁의 끈을 놓지 않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보존하고 있다면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부디 요나서를 읽어 나가는 동안에 우리 인생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행복이 찾아오기를 기대해 본다.